- 퇴계명상길에서 얻은 밤톨 하나 -
우연한 기회에 안동 도산서원에서 운영하는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연수를 받게 되었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이황선생의 얼을 기리며 사회의 양심이자 지성과 인격의 기준이 되는 선비문화를 익혀 지도력 있고 책임 있는 사람을 길러낸다는 기치를 걸고 운영하는 수련원이다. 선비정신과 퇴계선생에 대한 삶의 한 부분을 알아가면서 나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 마음이 연수 끝날 때까지 함께 했다.
연수 두 번째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연수생들과 함께 퇴계명상길을 걸었다. 이 길은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선생이 종택에서 도산서원을 넘나들던 언덕길로 생전 후학양성과 지인을 만나기 위해 매일같이 걷던 길이라고 한다. 아직 동트기 전의 새벽이라 어둠이 짙고 고요하여 길 옆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만이 선명하다. 어제 밤새 내리던 비가 새벽녘에야 그쳤는데 그래서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며 이 길을 걸어 도산서원을 오가던 퇴계선생도 물소리며 바람소리를 자주 시로 읊곤 했단다.
수련원을 떠나 숲 속 오솔길로 접어드니 수련원 근처의 가로등 불빛이 숲에 가려져 주위가 더 어두워진다, 비가 온 뒤 하늘이 흐린 탓도 있겠지만 초승달이 지고 난 뒤의 새벽시간이라 하늘의 도움을 받기는 애저녁에 포기하고 핸드폰 플래시(flash) 기능에 의지하여 밤길을 찾을 뿐이다. 풀벌레들의 단잠을 깨울까 염려되어 서너 명에 한 개씩 불을 밝히기로 했는데. 자기의 발밑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앞사람의 발길을 밝혀주면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내 발밑을 밝혀주는 도움을 나누면서 묵언수행(默言修行) 하듯 길을 걸었다. 언뜻언뜻 발밑을 비추는 불빛 사이로 씨앗을 매단 꽃대가 남아있는 질경이들이 온 길을 소복하게 덮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가을이 성급한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산마루에 오르니 들리지 않던 솔바람소리도 들린다,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가 이곳 도산의 오케스트라 연주라고 인솔자가 소개한다. 짧은 위트에서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언덕길을 내려와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어느새 여명이 밝아 안동댐 상류의 낙동강이 발밑이다, 간밤에 내린 비로 강물은 온통 붉은 황톳빛인데 강기슭의 나뭇잎들은 비에 씻겨 청아한 모습으로 대조를 이룬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 입구까지 이르는 길을 맨발로 걷는다. 맨발걷기에 익숙한 몇몇 수련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길을 처음 접해보는 나는 발바닥을 찌르는 작은 모래알들의 힘에 밀려 큰 몸이 기우뚱거린다. 익숙하지 않은 낯섦이 짜릿한 자극으로 몸에 전해진다. 간밤에 내린 빗방울에 보드라운 흙은 씻겨 내려가고 조금 굵직한 모래들이 알알이 박혀있는 흙길을 골라 디디면서 불현 듯 어느 마라토너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나를 힘들에 한 것은 42.195Km의 거리가 아니라 운동화 속으로 들어온 작은 모래알이었다.” 작은 모래알이 달리는 내내 얼마나 선수를 힘들게 했을까 공감하며 1Km도 안 되는 길을 마라톤 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서원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발을 씻는데 발바닥이 쓰라리다. 깨끗해진 발 위에 양말과 운동화를 신으니 산이고 하늘이고 가릴 것 없이 뛰어 오를 듯 포근하다. 지금 같아서는 세상 어디라도 걸을 수 있을 듯하다.
오늘의 삶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지나가고 나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기쁨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지금의 불편함을 피하지 말고 이겨내는 나만의 인내를 키워가야겠다는 교훈을 얻은 새벽 산행이다.
산길을 돌아오는 길에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알밤들이 떨어져 길 위에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밤톨 몇 개를 주워 들고 오다가 이내 숲속으로 던져 주고 퇴계 선생의 시 한 구절을 되뇌어 본다.
所願善人多(소원선인다) 是乃天地紀(시내천지기)
바라노니 착한 사람 많이 만드는 것,
이게 천지의 덕 갚는 도리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