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의 시대를 지나, 상생의 플랫폼을 짓다”
한 사람의 삶은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고통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철학이 된다. 그리고 철학은 결국, 어떤 일을 ‘왜’ 하는가를 설명하는 가장 깊은 이유가 된다.
디지털 플랫폼 기업 〈포스있지〉를 이끄는 정재헌 대표의 이야기는 단순한 창업 서사를 넘어, 그가 견뎌야 했던 시대의 흔적과 사회 구조의 모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공정하게 바꾸려는 한 사람의 도전기다.
“어릴 적엔 삼촌이 참 많았습니다. 모두가 다정했고, 자주 용돈도 주셨어요. 하지만 그들은 진짜 삼촌이 아니었습니다.”
정재헌 대표는 담담하게 자신의 유년 시절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정동년 선생,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전후로 당시 전남대학교 복학생협의회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군사재판에서는 “김대중에게 공작금을 받고 폭동을 조장했다”는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 시기, 어린 정재헌은 아버지의 부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삼촌’이라 부르는 어른들의 방문을 수시로 받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들이 형사였고, 자신은 아버지를 추적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그 기억은 아프고도 오래 남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국가적 구조 속에서 얼마나 쉽게 대상화될 수 있는지를 어린 나이에 깨달았어요. 그 경험은 제 인생 전체에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억압의 기억을 넘어, 연결의 기술로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다만, 정 대표는 그 기억 위에 ‘무엇을 지을 것인가’에 집중했다. 억압과 감시로 얼룩진 유년의 경험을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은 그는, 후에 소상공인과 VAN(부가가치통신망) 딜러 간 카드단말기 거래 구조에 주목했다. 그 시장은 정보 비대칭과 불투명한 계약, 높은 수수료, 영세업자에 대한 강매성 계약 등이 고질적으로 존재하던 구조였다.
“겉보기엔 정돈된 B2B 시장 같지만, 알고 보면 현장에서 피해 보는 소상공인이 많았습니다. 또, 실질적으로 시장을 움직이는 건 딜러들인데, 그분들도 중간 구조에 묶여 너무나 쉽게 소외되더군요.”
"포스있지"의 탄생 – 약자를 연결하는 플랫폼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 대표는 기술 기반의 매칭 플랫폼인 〈포스있지(POS IZZI)〉를 창립했다. 이 플랫폼은 전국의 VAN 딜러와 소상공인을 직접 연결시켜, 단말기 설치 및 카드결제 서비스 계약을 보다 투명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
“이 플랫폼의 핵심 가치는 ‘공정한 정보 접근’입니다. 소상공인은 더 이상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하지 않아도 되고, 딜러는 더 이상 과도한 수수료를 넘기거나 본사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 VAN 업계는 대형 카드사의 수수료 인하 압력과 디지털 결제 확산으로 인해 약 50%가 구조조정 상태에 있다. 특히, 영업을 담당하는 딜러들은 조직 외곽으로 밀려나고, 고정 수입 구조가 무너져 생계 자체가 불안정해졌다.
포스있지는 이러한 구조적 위기 속에서 상생 기반의 영업 구조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 소상공인에게는 비용 절감과 계약 만족도 상승, 딜러에게는 영업 기회 증가와 플랫폼 기반의 수익 모델 제공이라는 효과를 제시한다.
기술은 효율보다 철학이 먼저입니다
정 대표는 플랫폼 기업이 가지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다.
“기술은 무조건 빠르고 편리하게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어떤 구조를 바꾸려 하는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그게 창업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만드는 시스템은 단순한 매칭 앱이 아니다. 플랫폼 내부에는 소상공인을 위한 표준계약 안내, 딜러 간 리뷰 시스템, 지역 기반 영업권 조정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다. 단말기 설치 이후의 관계 지속성까지 고려한 설계다. 이는 대형 VAN사나 카드사에서는 시도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억눌림을 겪은 사람은, 억눌리는 구조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정 대표는 여전히 현장을 누빈다. 직접 딜러를 만나고, 소상공인의 불편을 듣는다. 때로는 거절당하고, 때로는 “왜 이런 플랫폼이 이제야 생겼느냐”는 격려도 받는다.
그는 묻는다. “과거 저와 제 가족이 겪었던 억압은, 지금 이 시대에도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보가 없어서 불리한 계약을 맺는 소상공인, 본사의 정책 때문에 수입이 끊긴 딜러들. 구조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플랫폼을 통해 그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지금 분명한 파장을 만들고 있다. 각 지역의 딜러들이 자발적으로 플랫폼에 합류하고 있고, 소상공인들 사이에서는 “투명하고 믿을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포스있지는 시스템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정재헌 대표는 스스로를 기술인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연결 설계자”라 말한다. 억압을 이겨낸 아버지의 길처럼, 그는 시스템의 외곽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다.
“저는 기업이, 플랫폼이, 시스템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누군가를 덜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고, 기술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억눌린 기억 위에, 상생이라는 이름의 플랫폼을 세우는 사람. 정재헌 대표와 포스있지는 오늘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