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마라. 지금 그대로 부딪혀라.
완벽히 준비된 타이밍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존재하는가? 글쎄. 내 생각에 인생에서 완벽히 준비된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에서 무엇인가에 도전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태도다.
나는 30대에 모 대학에서 해외취업 PM 겸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 시기가 코로나 사태로 국경이 닫혀 있던 때였으니, 아마 2019년에서 2021년 무렵일 것이다. 계약 당시, 나는 베트남과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 취업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부터 짐작했다. 왜 이 직위의 연봉이 높은지. 해외취업 담당자라는 직함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해외 영업과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내가 취급해야 할 '상품', 즉 학생들의 강점과 경쟁력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는 무모함으로 도전해야만 했다. 내 모든 과거가 성공작은 아니었다. 다만 실패했어도 나는 돌고 돌아 결과를 가져오는 악바리파에 가까웠다. 내 끈질김과 깡이 내 인생을 받치고 있었다. 이번도 그저 한 번의 다른 도전일 뿐이었다.
나의 첫 직장은 조그마한 무역회사였다. 입사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이란과 터키의 수입 거래처를 직접 찾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업체 정보를 수집하고, 무작정 국제전화를 걸어 수입 가능 물품의 사진을 이메일로 요청했다. 나는 해외에서 정확히 ‘거주’한 경험은 없다. ‘학위’를 딴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영어나 타 언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미믹킹을 꽤 잘하는 편이어서 언어 습득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전화 영어가 무섭지도 않았고 처음 말을 건네는 수입 거래처의 반응이 무섭지도 않았다. 그냥 전화일 뿐이었다. 물건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수입 업무를 담당하던 회장님의 몫이었다. 괜찮은 거래처로 판단되면 출장을 계획했다. SNS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전화와 이메일이 가장 빠른 소통 수단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업무 방식은 이후 어떤 직장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강단에서 일해왔고 영업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실적이 중요하여 늘 결과를 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쟁 같은 날들이 이어졌고, 나는 늘 치열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20대와 30대의 나는 대체 어떤 체력으로 새벽 4시까지 술자리를 갖고도 출근 시간을 지켰을까. 다리는 후들거려도 얼굴엔 미소를 띠었다. 그것이 직장인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나 역시 '라떼 세대'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 되었다. 정확히 하자면 M세대, 혹은 꼰대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강단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웠다. 다양한 청중을 상대하며 강연법과 발성을 익히고, 즉흥적인 대응 능력을 키웠다. 그 능력들이 무색하게도 스펙이 중요하던 대학의 해외취업을 총괄하는 자리의 최종 면접 자리는 매우 엄중했다. 나를 제외한 지원자들은 모두 미국 석·박사 출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특유의 배짱으로 면접실에 들어갔고, 전형적인 대학 면접 방식과는 정반대의 혁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합격했다. 아마도 면접관 중 나만큼 괴짜가 있었던 모양이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기대보다 현실이 훨씬 가혹했다. 학생들을 사회로 내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지방대 출신, 토익 점수조차 기준 미달인 학생들을 기업에 어필하려면 전략이 필요했다. 문제는 동남아 현지 기관에 인맥조차 없었던 나에게 그 전략을 펼칠 시간 또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게 주어진 목표는 20명의 학생을 취업시키는 것이었으니까.
그 과정은 악몽 같았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기쁨은 컸지만,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흘린 피땀눈물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해외 취업은 단순한 행정 업무가 아니라,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Z세대 학생들을 교육하며 꼰대 문화를 가르쳐야 했고, 현지 기업을 방문해 Z세대가 기존 세대와 다름을 강조하며 긍정적인 합의점을 도출해야 했다. 수많은 술자리를 거쳤고, 수많은 부탁과 협상이 오갔다. 실적이 코앞에 닥치면 자존심을 세울 여유조차 없었다. 매일같이 이메일을 보내고 현지 회사에 전화를 걸고 공공기관과 소통했다. 다행히도 몇몇 법인장과 인사 담당자들은 진정성을 알아주었다. 그렇게 불타는 2년을 보내고, 결국 나는 병원에 실려 갔다. 1년간의 휴식이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람된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 취업한 학생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흐뭇하다. 그들은 이제야 내가 했던 잔소리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한다. “버티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버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도, “쓰러지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말도, 이제는 그들에게 실감 나는 조언이 되었을 것이다. (온갖 명언들을 만들어주신 선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칼럼을 마치며, 혹시 이 글을 읽을 Z세대에게- 내 제자들에게 마지막 수업시간에 남긴 안녕의 인사처럼 마지막 당부를 남긴다. 언젠가는 그대들에게도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마라. 지금 그대로 부딪혀라. 오를 수 있는 언덕을 찾고 하나씩 올라가라.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오지 않는다. 사회는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를 준다. 암벽 등반을 완벽한 장비가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오르지 못한다. 미완성인 것은 당연하다. 선생님을 봐라. 나조차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너희는 아직 20대다. 몇 번을 무너지고 쓰러져도 너희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대체 '영앤리치(young and rich)'가 되어야 한다는 너희의 말모를 압박감은 누가 심어주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몸을 사리지 마라. 쓰러지고, 아파하고, 때로는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 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지겨워서라도 다시 일어난다. 20대에 수없이 깨지고 일어나야 40대가 되어 단단한 돌멩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에서 완벽한 준비가 된 순간은 없다. 그래도 가야 한다. 악으로, 깡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