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피난민들에 15동의 주택 건립, 희망촌이라 명명
- 진정한 희망촌의 의미 되새겨야

)원주역 근처에 위치한 희망촌(希望村)

글자의 의미 그대로라면 가슴 두근거리며 희망으로 설레는 활기 가득한 마을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원주 희망촌은 여전히 홍등이 걸린 성매매 업소를 상상하게 된다.

희망촌의 유래와 다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찾아본다.

 

 

희망촌은 어떻게 생겨났나 사업가 이재춘 선생이 명명

1945년 광복을 맞은 기쁨도 잠시, 남한은 좌우익이 맞서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원주가 고향이었던 이재춘은 일제 강점기 원주재판소에서 근무하였고 다년간 사법서사를 운영하였던 성실한 청년이었다. 이후 서울에서 운수업, 제지업, 고무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였기에 당시 원주에선 유지였다. 30대 후반이었던 그는 원주집의 사랑채를 증축하려 인부들과 조약돌을 보러 갔다가 봉산교 아래 빈민들의 딱한 처지를 만나게 된다. 북한의 공산화 정책을 피해 탈북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집도 없이 다리 아래에서 가마니를 깔고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는 몹시 놀랐다고 한다.

원주의 유지들에게 이를 알리고 빈민들을 위한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별반 호응이 없었다. 혼자의 힘으로라도 돕겠다고 가족들에게 그의 결심을 전한다. 자선사업을 결심한 그는 지역사회에 알렸고 빈민들을 위한 주택 건립을 추진한다. 당시 후원회장으로 있던 봉산초등학교(현 원주초등학교)와 학성초등학교, 원주농업고등학교(현 영서고등학교) 학생들이 방과 후 원주천에서 조약돌을 날라다 건물의 기반을 다졌다. 어린 학생들의 소중한 품앗이 봉사도 주택을 건립하는데 몫을 한 것이다.

 

희망촌  건립 후 마을 주민과 이재춘 = 사진 이상호 제공
희망촌 건립 후 마을 주민과 이재춘 = 사진 이상호 제공

15동의 주택이 건립되었고 한 동에 2가구씩, 30세대가 입주하게 되었다. 이재춘 선생은 각 세대에 약간의 생활비를 지급해 주며 희망을 가지고 살라며 이 마을에 희망촌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희망촌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 마을에서 가난을 떨치고 희망을 안고 힘차게 살아가라는, 당연히 희망촌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레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입주민들이 어느 정도 정착해 나가자 194631일 그들은 이재춘 선생의 자선사업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재춘 자선 기념비를 희망촌에 세웠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자선 기념비에 약간의 곡물과 닭, 계란 꾸러미 등으로 감사를 표했다.

 

 

희망촌이 희매촌으로

이후 이재춘 선생은 주로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생활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서울 집에 강원트럭동지회 소속 좌익 3명이 들이닥쳐 이재춘 선생을 끌고 갔으며 9.28 수복 전에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납북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희망촌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자선 기념비는 북한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현재 남겨진 자선 기념비는 이재춘의 동생 이재경에 의해 1950년대 다시 세워진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여느 역처럼 원주역도 사람들이 붐비며 숙박업과 유흥가가 생겼다. 그리고 윤락가도 생겨났다. 희망촌 역시 원주역 근처였으므로 윤락가가 들어섰다. 희망촌이란 이름도 주변의 매화촌과 합쳐져 희매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매매 업소가 집결되면서 본래의 희망촌 의미는 희석되고 변질되었다. 원주가 고향인 기자의 기억 속에도 원주역 주변은 범접할 수 없는 곳, 희망촌은 윤락여성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희망촌이란 이름이 거북해지는 시간이었다.

 

이재춘 자선기념비가 있는 광명마을 = 사진 김모니카
이재춘 자선기념비가 있는 광명마을 = 사진 김모니카
이재춘 자선기념비 = 사진 김모니카
이재춘 자선기념비 = 사진 김모니카

 

이재춘, 그를 기리는 광명마을

이재경이 다시 세운 기념비는 어느 가정집에 남았다가 원주시에서 원주시 사회복지센터 앞으로 이전하였고 학성동 도시 재생사업이 진행 중인 현재는 광명마을 경로당 앞으로 이전하여 이재춘 선생의 뜻을 기리고 후대에 알리기 위한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희망촌, 그곳 가까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공원에서 바라보면 구)원주역의 급수탑이 보이고 몇 걸음을 걸어 마을로 들어서면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영업이 진행 중인 성매매 업소가 있다. 하지만 이곳은 어려운 시절, 원주를 살아낸 사람들의 희망이 머물렀던 곳이다. 이재춘 선생이 떠난 시간은 길지만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고자 했던 뜨거운 마음과 희망촌을 일구어 살아낸 감사의 마음이 이재춘자선기념비와 함께 남아 있다. 이재춘 기념비에는 投財亂民(투재난민) 庇寒一端(비한일단) 惠及共流(혜급공류) 實賴是休(실뢰시휴) 라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어지러운 피난민에게 재물을 투자해서 한끝의 추위를 가려 주었네. 은혜가 퍼져서 함께 흐르니 실제로 이복을 받고 의지가 되었네라고 한다.

원주의 희망촌이란 이름, 그 이름의 의미는 윤락촌이 아니라 어려운 시대의 원주를 살아낸 사람들의 희망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선사업가의 선물이었다

 

 

원주는 장일순 선생, 김지하 선생, 지학순 주교, 박경리 작가 등이 활동한 생명 사상과 협동조합의 도시이며 풀뿌리 민주주의 상징인 도시이다. 시민 서로돕기 천사운동에 참여한 원주시민이 9만여 명에 이르고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원주시민이 99천여 명이다. 이런 원주시민의 이웃과 함께하는 이타 정신은 오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재춘 선생과 함께한 시민들이 보고 느끼며 기리는 시간 속에 원주 지역 곳곳에 자리매김했으리라. 학성동은 도시개발 사업으로 날로 변화하고 있다. 희망촌이란 이름이 선생의 뜻처럼 가진 것 없고 삶이 버거운 이들에게 희망으로 남는 이름이길, 그리고 희망촌이란 지역이 다시금 활력을 얻어 밝고 환한 지역으로 재탄생하길 바라본다.

 

 

자료에 도움을 준 이상호(그림친구, 청년예술가) 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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