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길 바라며
요즘도 김순녀 원장은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가서 꼭 안아주고도 싶다. 아이들을 싣고 시내를 오가는 노란색 미니 버스를 볼 때는 마치 자신이 운전이라도 하는 양 조바심이 일기도 한다.
30년 세월을 어린이집, 유치원 원장으로 살았으니 아직도 누군가 원장님 단어를 꺼내면 자신을 일컫는 말로 착각하기도 한다.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아이들과의 만남에 첫 발을 디딘 이후, 자라나는 영유아들을 바르고 건강하게 키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매진했던 지난 3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의 손을 거쳤던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른다. 유난히 애정을 기울였던 아이들은 꿈 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이제는 성년이 넘었을 아이들이 꿈 속에서는 아직도 콧물을 흘리고 울고 보채기도 하는 어린애로 나타나니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다.
Q) 원장님, 어떤 계기에서 유아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제가 여러 남매들 사이에서 성장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적었어요. 꿈이 많던 여고시절 동네에 많은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입학 전 유치원 교육이라는 건 생각하기 힘들었죠. 다들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이라. 그 때 제가 이 다음에 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처음 아이들 교육을 시작한 곳은 원주인가요?
-아니요, 저는 삼척이 고향입니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고향인 삼척에서 유치원 보육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0년 세월 삼척에서 어린이집, 유치원 교사, 원장으로 일을 했습니다.
Q) 원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유아교육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바른 인성의 소유자로 보육할까 하는 뜻에서 공부를 조금 더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느꼈던 공부로 보육현장에서 아이들 교육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항상 일곱색깔 무지개로 빛날 것 같았던 김 원장의 인생에 불운이 찾아온 건 5년전쯤. 갑자기 다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용하다는 병원을 다 가봐도 잘 고친다는 의사를 다 만나봐도 도대체 병명을 모른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천직으로 알고 정말 열심히 일만 했던 아이들 곁을 떠나야 한다니. 울기도 참으로 많이 울었다.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다른 일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삼척에서 운영하던 유치원을 접고 불편한 다리를 고치기 위해 의료여건이 좋은 원주로 이사를 감행했다.
Q) 다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때 정말 힘드셨겠어요?
-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30년 세월을 보냈는데 사랑하는 아이들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어요.
Q) 요즘 불편하신 다리는 좀 어떠세요?
-재활치료도 열심히 하고, 시간 나는 대로 걷고, 서울로 물리치료도 받으러 다니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는 혼자서도 걸을 수 있답니다.
Q) 아직도 아이들이 있는 교실이 많이 그리우신가요?
-정말 아이들을 보육현장에서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삼척에서 유치원 운영할 때 사용하던 교육 기자재를 아직고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원주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나겠다는 꿈은 버릴 수가 없네요.
Q) 정부에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통합하는 유보통합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이제는 출생율의 급격한 저하로 유보통합 정책을 실행할 여건이 되었습니다.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한 보육현장의 목소리가 골고루 반영돼 자라나는 우리의 2세들의 보육환경이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유아교육에 바친 30년 청춘. 김순녀 원장은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다만 아이들을 아직은 못 만나는 현실이 야속할 따름이다. 하루빨리 아이들이 웃는 보육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은 생을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는 그만한 축복이 없을 것 같았다. 김 원장의 앞으로의 인생이 환하게 밝혀지길 빌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