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 원주천의 과거와 현재
조선 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머물면서 지었던 <관동별곡>은 양주와 여주를 거쳐 간현을 거쳐 원주로 들어오는 과정을 '한수를 돌아드니 섬강이 어드메뇨, 치악이 여긔로다'로 절경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원주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유적조사에서 지정면 월송리, 부론면 흥호리‧법천리 등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고, 원주 전역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수만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한 시대에 원주는 마한의 동쪽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로 이어지는 지배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원주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원주분지의 비옥한 토지로 풍요로운 삶의 터전인 데 기인하였을 것이다. 농경사회의 풍부한 물산은 물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원주천은 농경사회 원주의 풍요를 가능하게 한 농수원이 되고, 물산의 이동로가 되었음을 ‘배말’ 등 지명을 통하여 짐작할 수도 있다. ‘원주’란 지명은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원주천’은 과거에는 봉산의 이름을 따서 ‘봉천(鳳川)’ 또는 ‘봉산천(鳳山川)이라고도 하였고, 강원감영의 동쪽을 흐르므로 ‘동천(東川)’이라고도 하였는데, 화천과 합치는 치악교 위쪽까지를 ‘봉천‧봉산천’이라고 부르고, 그 하류 즉 봉산동 앞은 ‘원주천’이라 구분하여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부 ‘원주천’이라 한다.
이제 원주천에 대해서 알아보면, 원주천은 섬강에 합류하는 국가하천으로, 섬강의 제1지류이고, 한강의 제2지류이며, 치악산 남대봉과 가리파에서 발원하여, 원주시가지를 남쪽에서 북서쪽으로 관류하며 사방의 구릉지를 침식하여 이른바 원주분지를 형성하고 호저면 주산리 평내에서 섬강에 합류하며, 2020년 1월 1일에 국가하천으로 승격 고시되었으며, 고시구간은 판부면 금대리에서 호저면 주산리까지 하천연장은 22.7km. 유역면적 152.9km²이다.
원주천은 신촌천, 입춘내천, 화천, 흥양천,단계천, 개운천(?)등의 지천이 있으며, 21개의 복합교량과 12개의 보행교, 21개의 전통보와 11개의 여울보가 설치되어 있는대, 이 시설물들은 도시의 확대로 도시기능 유지와 과거의 농경을 위한 필수 시설되기도 했지만, 홍수 예방, 기타등의 목적으로도 설치되었다.
원주천은 도시 인구가 팽창하고 도시화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원주천은 오염되고, 하천 주변 개발로 원주천의 본래 기능을 상실되면서 점점 더 오염이 가중되는 과정에서, 하수종말처리장이 1995년부터 가현동에 건설되어 가동을 시작한 이후 원주천의 수질 상태가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원주천을 중심으로 하는 하천 주변의 개발은 더욱 심화 되고,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많은 교량의 건설, 시민의 복지개선을 위한 많은 시설물의 설치되므로 해서, 원주천의 홍수조절 기능뿐만 아니라 생태하천으로써의 역활도 문제가 되어 ‘생태하천 복원사업’(영서고앞 - 반곡동 입춘내천 합류점)이 진행되게 되었고, 4년에 걸쳐 모니터링(대평교 – 태학교)하여 분석한 결과에 대해 원주지방환경청에서는 잠정 성공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이다.
다음회부터 현재 진행중인 원주천 재해 예방사업을 비롯한 현재의 원주천과 상류,중류,하류주변에 있는 원주천 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