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를 나에게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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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질문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누군가 나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나는 경민이(가명)를 떠올릴 것이다. 

 경민이를 처음 만나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치원 학부모 한 분이 오셔서 자기 옆집에 가봐 달라고 하면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집에 갔더니 작고 힘없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좋은 느낌에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아빠 다리 아래에 태어난 지 2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가 눌려있었다. 아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음도 제대로 울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아기를 들고 병원으로 뛰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몇 시간 후 아기의 아빠가 유치원으로 찾아왔다. 아기의 엄마는 베트남 사람으로 아기 아빠가 폐암 말기라고 진단을 받자 아기를 낳고 2달도 안 돼서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는 폐암 투병 와중에 혼자서 아기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게 너무 속상해서 자꾸 술을 마셨다고 했다.

 이미 아빠는 혼자 일상생활을 하기도 힘들어 보였기 때문에 그 날은 우리 집에서 아기를 재우기로 하고 다음 날 주변 친척들을 만나 아기의 거취를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기를 선뜻 맡겠다고 하는 친척은 없었다. 결국 아기는 돌볼 사람이 생길 때까지 우리집에서 주로 지내고 아빠가 컨디션이 좋은 날은 아빠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2개월 후 아기의 아빠는 돌아가셨고 5개월도 안 된 경민이는 우리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경민이는 어떤 것에도 웃지 않고 어지간한 것에는 울지도 않았다.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아 우울증이 의심되었다. 이 작은 아기가 어떤 고난을 겪었기에 이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까 생각하자 울컥 가슴이 메어왔다. 그냥 사랑을 주고 싶었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사랑을 줄 수 있을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못 받은 사랑을 다 채울 만큼 사랑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던 가족들도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니 돕겠다고 했다. 나를 주 양육자로 가족 모두가 경민이의 이모, 삼촌, 할아버지가 되기로 했다. 그저 사랑을 주겠다고 마음먹으니 내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몰랐던 감정들이 차올랐다. 처음으로 경민이의 눈이 나를 쫓기 시작했을 때, 경민이가 처음으로 나를 보고 웃어줬을 때, 나와 경민이가 한참 동안이나 서로 눈을 바라보면서 놀던 때, 처음으로 나를 향해 걸음을 떼었을 때, 그리고 경민이가 “사랑하니까 경민이가 도와줄 거야”라고 말할 때,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의 기쁨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경민이는 예쁘게 자랐다. 돕기를 좋아하고 애정표현을 잘하는 아이로. 안정 애착 검사에서도 양육자와의 애착이 잘 형성된 안정 애착아라고 진단받았다. 진단 자체에 큰 의미는 없지만 뿌듯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3년이 지나 아이가 없는 친척이 경민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경민이는 그렇게 나에게 큰 사랑과 기쁨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서 목표 없이 생각 없이 그냥 사랑을 주고받았던 적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늘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내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잘 키우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엄하게 가르쳤고, 필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비단 자식들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랑보다 충고와 쓴소리를 했다.

 경민이가 내 삶에 와서 이런 큰 사랑과 기쁨을 주고 난 다음에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기쁨을,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좋은 것임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때가 이미 경민이의 엄마보다는 할머니가 어울릴 나이였으니 아쉬운 일이다. 

 경민이와의 특별한 만남 이후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하게 되었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달콤하게 만들었다. 아들의 사랑한다는 메모, 친구들의 따뜻한 연락, 유치원 아이들의 뽀뽀와 함께. 

 뭐든 이루고 싶고, 의욕이 넘치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걸 먼저 하라고. 그게 너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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