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 인생의 퍼즐 한 조각을 정확하게 맞추어준 그곳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먼저 제대하는 동기들의 전역 신고식을 마친 후 아쉬움을 달래며  찰칵.                                                                                                                      (사진제공 : 윤지태 기자)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먼저 제대하는 동기들의 전역 신고식을 마친 후 아쉬움을 달래며  찰칵.                                                                                                                        (사진제공 : 윤지태 기자)

 내 인생에 모든 공간이 나름 의미가 있지만 그래도 가장 의미 깊었던 공간은 군대생활 33개월 을 보낸 곳이다. 평소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를 힘겨워했던 나에게 군이라는 곳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남녀 성비가 절반 정도씩 구성되어 있는 세상에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특별한 곳에서 만들어진 틀에 하나씩 둘씩  맞추어져가는 내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보람과 함께 성취감도 있었다. 다시 입대하라면 에둘러 손을 내저을 정도로 가기 싫은 곳이긴 해도 내 인생의 퍼즐 중에 그래도 가장 정확히 맞추어진 퍼즐조각이다.

 대가리 박아!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우당탕! 쿵! 쾅! 1977년 3월 16일새벽, 육군훈련소 내무반의 낯선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1977년 3월 15일 원주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하라는 입영통지서를 받아들고 학교를 찾아갔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청년들의 웅성거림과 가족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에 섞여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 분리선을 넘었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운동장에는 새끼줄 같은 줄로 운동장 바닥에 표시를 하고 그 줄을 중심으로 배웅나온 이들과 헤어져 그 선을 넘는 순간 민간인 신분에서 ‘장정’이라는 명칭으로 군인들의 통제를 받게된다.

 평소 타던 열차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으니 그때부터는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했고 목이 말라도, 생리현상도 모두 참아내야 하는 극기의 시간이었다. 긴장과 고통 속에 밤새도록 멈추었다 가기를 반복해 새벽에 도착한 곳이 연무대역으로 기억된다. 안내 병사들을 따라 내무반에 들어서자 곧바로 군기 잡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마루로 된 침상에 올라가게 하더니 삼선에 정렬!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우당탕! 쿵! 쾅! 도대체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어리둥절해있다가는 바로 개별 응징이 뒤따른다. 마침 그 소리를 알아듣고 따라 하는 동기들을 쫓아 눈치껏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앉아, 일어서를 반복하다 보니 아침이 되었다.

 절차에 따라 훈련복으로 갈아입으면 비로소 내가 군인이 되기 위해 훈련소에 입소했음을 인식하게 되고 ‘장정’에서 ‘훈련병’으로 명칭도 바뀌게 된다. 그때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라 훈련복은 선배들이 입었던 훈련복을 세탁하고 수선해서 입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질반질한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어지긴 했지만 고무 재질로 된 네모나고 얇은 식기는 숟갈로 세게 긁으면 쩔어 붙어있는 것이 긁혀지던 기억이 난다.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잠자는 시간 외에는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훈련이 없는 일요일에도 알철모에 물을 떠서 훈련소 내 도로를 씻어내도록 했던 것을 보면 훈련소 밖의 일들을 잊게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거 같다. 20여 년간 살아온 나를 온전히 내려놓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곳이다. 훈련소에서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면 ‘훈련병’에서 ‘이등병’이 되는데 군 생활 중 가장 짜릿한 계급장이다.

 첫 번째 관문인 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나서 이동된 곳은 군기 세기로 소문난 운전교육대였다. 당시 운전대를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던 나는 또 하나의 모험을 해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는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한 번의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군 기강이 셀 수밖에 없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엄청난 체벌을 감수한 덕분에 동기생 120명 대부분 최종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하고 11주간의 훈련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모두 비슷한 처지여서 운전교육을 받는 동안 전우애 이상의 정이 들어 자대 배치를 명을 받고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몇몇 과정을 거쳐 자대를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군용트럭을 주로 이용하지만 특이하게 육지에서 육지로 이동하는데 8월 삼복더위에 냉방시설이 전혀 없는 배 밑창에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처럼 빼곡히 앉아 이동할 때는 쪄죽는 줄 알았다.

 훈련 교육과정 중에는 빨리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가고 싶었는데 막상 자대에 와보니 남편 잘못 만나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하게 된 며느리 같은 신세였다. 나의 명칭은 '신병'이 되고 나 외에는 모두 선임병이었으니 그 부담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고 공교롭게도 전입신고하는 날 선임 병장 한 명이 전역신고를 했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부러웠냐고 질문하면 그때 그 선임병이 제일 부러웠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부대의 임무는 전시에 교량이 폭파되면 신속하게 조립교량을 구축해  병력과 장비가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나의 주 임무는 조립교 자재를 운반하는 운전병 역할이다. 평시에는 비상시 출동이 가능하도록 차량을 관리하고 조립교 자재를 항상 A급으로 유지하기 위한 관리를 한다.  가장 힘든 건 조립과 철거를 반복하는 조립교 훈련이다. 자재가 크고 무거워서 힘도 들지만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안전사고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훈련의 목표가 안전하고 정확하게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기에 무거운 자재를 가지고 반복하는 훈련은 정말 힘들었다. 만족할만한 결과가 안 나오면 뒤따르는 것이 얼차려란 이름의 혹독한 기합이였기에 기를 쓰고 시간 단축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 회상해 보면 젊으니까 할 수 있었던 참 즐거운 추억이다.

 군 생활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 될 때를 흔히 말년이라고 하는데 그때 가장 마음 졸였던 사건 하나 적어본다. 말년에 맞는 추석날이었다. 명절 회식 준비가 한창인데 비상이 걸렸다. 간첩 침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회식을 취소하고 모두 대간첩 작전에 임해야 하는 준전시상황이다. 당시 중동부지역에 간첩이 침투하여 임무를 마치고 북으로 무사히 넘어간 사건이 있은 후여서 초비상이었다. 밤이면 매복으로 경계를 하고 낮이면 수색대원들의 수색작전이 반복되었다. 간첩들이 숨어들었다고 하는 산을 겹겹이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가며 헬기를 띄워 자수를 권유하는 방송을 하면서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한 명은 우리 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하고 한 명은 탈진한 상태로 도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여 일간의 작전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쯤 또 하나의 비상사태가 발생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전군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완전군장을 꾸려서 전쟁준비 태세로 전환되었다. 전역을 눈앞에 둔 시점에 전쟁이라니 하며 원망도 해봤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총을 들고있을 때 전쟁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전쟁으로 확산되지는 않아서 그해 12월 6일자로 무사히 전역할 수 있었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면 군대 이야기로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고 하는 말이 맞는 거 같다.

 총구 끝에 흙이 들어가 영창 갈 뻔 했던 일, 6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부대에 동기가 7명이나 되니 언제나 선임병들의 경계대상이 되어 수시로 집합당했던 일, 신병 때 이웃 부대와 축구시합 중 상대 선수 코피 터트리고 고참들에게 박수받았던 일 등 그 공간에서만 가능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난다.

 마무리로 에피소드 하나만 적어본다. 당시 대통령이 지역부대를 방문한다고 주변 모든 부대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휴일인 일요일도 부대 인력이 총동원되어 관할지역 비포장도로 고갯길마다 쓸고 주변 잡초를 제거하는 등 도로바닥에 공깃돌만한 돌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군단장·사단장·여단장 등 평소에는 보기 힘든 장군들이 수시로 오가며 도로 청소를 지휘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땐 그랬다. 며칠 동안이나 대통령 방문 준비에 난리를 쳤는데 막상 주인공은 나타나지도 않는 상황에 허탈해했던 일이 씁쓸하게 생각난다.

 "12744008" 이 번호는 내 인생의 한 토막을 연결하면서 받은 군번이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그 시절 그 공간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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