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면 됐다

  인생 2막은 솟아오르는 아침해처럼 찬란하리라.(사진제공 : 네이버 ) 
  인생 2막은 솟아오르는 아침해처럼 찬란하리라.(사진제공 : 네이버 ) 

 내가 숨이 차도록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던 건 아마도 우리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엄마. 마흔 초반에 홀로 되어 넉넉지 못한 살림에 7남매를 혼자 키우시느라 하신 그 고생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고만고만한 7남매를 키우기 위한 엄마의 노력은 정말 지독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영림서 솔밭을 한 달간 매고 8만 원을 벌어 그 돈으로 새끼 암퇘지 3마리를 샀다. 그 암퇘지가 커서 새끼를 한 번에 7~8마리씩 낳았고 7남매 납입금 낼 때마다 새끼 돼지가 한 마리씩 팔려나갔다.

 자식들 밥 굶기지 않으려고 농사일 품앗이는 우리 동네에 가지 않는 밭이 없었고 밭일 끝나면 집집마다 다니며 돼지밥 거두어서 머리에 이고 오셨다. 겨울철 장갑도 끼지 못한 맨손으로 돼지밥에서 돼지가 못 먹을 것을 건져내던 엄마 손은 겨울바람에 터서 종종 피가 났다. 그런 억척스런 엄마 덕분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모두 잘 클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 모두 엄마를 닮아서 열심히 잘 산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무의식 중 노력과 끈기는 내 신조가 되었고 일도 공부도 자식 일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던 어느날,  다리가 경직돼 걷지 못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이란 곳은 다 가서 검사를 해 봤지만 모두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해서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치료를 위해 서울 가까운 원주로 이사까지 하고 치료에 매달렸지만 다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하던 일을 모두 정리했기에 나의 하루는 길기만 했다. 우울증이 찾아왔고 삶의 의욕도 없어졌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우리 7남매 뒷바라지의 일등공신이었던 돼지들을 모두 팔아 막내 결혼자금에 보태고 돼지우리를 정리했다. 텅 빈 돼지우리를 함께 정리하고 엄마와 밥을 먹다가 물었다. 괜찮냐고.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식사만 했다. 그러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야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만하면 됐지 뭐.” 그 날의 선문답 같은 대화가 자꾸만 곱씹어졌다. 엄마는 무슨 마음으로 그 말을 하셨던 걸까? 엄마의 치열했던 그 날들을 생각하셨을까? 그만하면 됐다는 말을 되뇌이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돌아가신 엄마가 못나게 누워있는 딸내미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극이 1막 1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장까지 진행되면서 극은 여러 전환점을 맞는다. 나는 나의 가장 치열하고 찬란했던 장이 내 다리의 장애와 함께 끝났다는 게 괜찮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엄마를 닮은 나는 엄마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결국 한 장의 마무리와 다음 막의 시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만하면 됐다.’라는 말은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니까. 내 다음 막에는 아픈 다리도 있지만 다행히 사랑하는 내 가족과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보듬고 사랑하며 나 자신도 보듬고 사랑하는 게 다음 막에서의 내 역할이지 싶다. 

저작권자 © 투데이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