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교육 시대, 문과와 이과의 경계가 흐려진다
기업은 바깥 생태계를 이해하고 소통할 줄 아는 ‘T자형 인재’를 더 선호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오랫동안 문과와 이과라는 뚜렷한 구분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누구나 한 번쯤 ‘나는 문과형인가, 이과형인가’ 고민하며 선택을 강요받았고, 그 선택은 대학 진학부터 직장 선택까지 이어졌다. 마치 그 두 갈래 길 외엔 다른 삶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2025학년도부터 도입되는 고교 학점제는 이 오래된 틀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이제는 수학과 과학, 철학과 사회를 경계 없이 배우며, 학생 스스로 자신의 진로에 맞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 단순히 과목을 더 유연하게 고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제는 ‘문과냐 이과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싶은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된 셈이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전환, 그리고 AI 시대. 기술이 중심이긴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개발한다고 해보자. 그건 단지 알고리즘을 짜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데이터는 어디서 수집하고, 그걸 어떻게 쓰며, 어떤 윤리적 문제들이 생길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법률, 철학, 정책 등 이 모든 게 기술과 함께 가야 한다.
맥킨지는 2021년 보고서에서 앞으로 고소득 직종의 40% 이상이 여러 분야에 걸친 융합 역량을 요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2023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향후 5년간 가장 중요할 기술 역량으로 분석적 사고력과 창의적 사고력을 꼽았다. 이 두 능력은 어느 한 전공 안에서만 키우기 어려운 것들이다. 넓게 보고, 다양하게 접근해야만 가능한 역량이다.
물론, 전문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반도체 엔지니어, 신약 개발자, 의사나 퀀트 분석가처럼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려면 여전히 깊이 있는 지식과 기술이 필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단일한 전문성만으로는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그 전문성이 낙후된,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 익힌 전문성보다 더 진보해진 현재와 충돌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그래서 요즘은 제네럴리스트, 즉 여러 분야를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주목받고 있고 기술과 문화, 정책과 경영, 사람과 데이터를 엮어내는 역량이야말로 지금 시대가 원하는 능력이다.
실제로 구글이나 애플, 테슬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채용 시 전공을 크게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분야에 깊이를 가진 동시에, 그 바깥 생태계를 이해하고 소통할 줄 아는 ‘T자형 인재’를 더 선호한다. 국내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카카오, 네이버, 토스, 쿠팡 등 실무 중심 인재를 선호하며, 기업들은 전공보다는 문제 해결 능력과 적응력에 더 크게 관심을 둔다.
이제는 '한 우물만 판 사람'과 '멀티플레이어' 중 무엇이 맞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두 가지를 어떻게 잘 조화시킬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MIT Sloan Management Review에 따르면, 조직의 고위직은 단순한 전문성만이 아니라, 인접 분야에 대한 이해와 리더십 경험까지 갖추길 요구한다. 즉, 한 분야서에만 갇혀 있으면 큰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반대로 넓기만 하고 깊이가 없으면 실질적인 실행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말하는 이상적인 인재상은 ‘융합형 스페셜리스트’다. 전문성과 융합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 말처럼 쉽지 않지만,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이 둘을 겸비한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런 변화가 시작된지 오래다. 미국과 유럽은 일찍이 STEAM 교육을 보편화했고, 싱가포르나 핀란드 같은 나라들은 아예 국가 교육과정에 융합 프로젝트 수업을 필수로 넣었다. 한국은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산업 변화에 발맞춰 점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 K-바이오, K-콘텐츠, 반도체, 친환경 에너지 산업들을 보더라도 기술과 문화, 정책이 자연스럽게 엮여야 성과가 나는 분야들이다. 다만, 아직은 제도나 기업 문화 전체가 이 변화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는 아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지금은 문·이과의 경계를 따지기보다는, 그 경계 바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다.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동시에 넓게 연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다면, 그야말로 변화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생존 전략을 가진 셈이다.
세상의 기준은 이미 바뀌었다. 한국 역시 이제 그 변화의 물결 속에 들어섰으며, 앞으로의 경쟁은 어떤 전공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있고, 동시에 넓은가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