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발자취와 현실
이제는 나를 위한 일도 하면서 주변에 도움을 주는 일도 해보고자 한다
학창시절의 나는 하루빨리 집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것 같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집과 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학교와 시골집을 통학하면서 밤마다 옆마을 ‘병호’ 친구를 만나서 소주를 마시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당시 고교를 졸업한 후 취업을 해서 대전 소재 방위사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는 내게 많은 조언을 해주면서 기왕 입학한 대학을 졸업하도록 나를 설득하였다.
그는 또한 대단한 효자이기도 하였다. 나중엔 수자원공사 사원으로 입사하여 대청댐, 보령댐, 팔당댐을 관리하는 힘든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내색을 않고 주말마다 시골집에서 연로하신 부모님의 농사를 돕곤 했다.
그의 조언에 따라 대학 2학년까지의 방황을 끝내었고 삶에 대한 사고방식을 전환하여 3학년 때부터 학업에 매진하였다. 그의 조언으로 인한 나의 삶의 긍정적인 전환으로 얻어진 것들이 많았다. 그와 함께 시골집에서부터 걷기로 하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대둔산 정상까지 올라갔고 케이블카가 없던 시절에 걸어서 하산하여 직행버스를 타고 대전 시내까지 나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밤늦게 시골집으로 돌아온 추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대학생활을 마치고 끝내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이 많은 고향집과 이별하고 강원도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대다수 대학 동창생들은 서울로 갔지만 나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서 강원도를 택하였다. 지금은 카지노로 유명한 V자 계곡 주위 환경이 온통 시커먼 광산촌에 직장 배치를 받았을 때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기가 막혔다. 흘러가는 하천 물도 온통 시커먼 석탄물이었다.
직장에 첫 출근하는 날 직장 선배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직후 광부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늘엔 헬기 두 대가 계속 선회하면서 감시를 하고 밤새도록 춘천에서 출발한 전투경찰대와 광부들의 살벌한 목숨을 건 시위와 진압작전으로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전투경찰 한 명이 시위대가 산으로 도망가면서 내던진 돌로 실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언덕진 곳에 위치한 쥐가 드나드는 연탄 아궁이가 딸린 단칸방을 얻어 지내면서 사표를 내고 대전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자취방 아래로 태백선 열차가 지나는 철로를 보면서 저 열차를 타고 제천에 가서 충북선 열차로 갈아타면 대전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일주일 동안 밤마다 고민하였다. 도저히 이런 광산촌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원하면 가능했던 서울의 직장을 택하지 않고 강원도를 택한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서울에서 몇 년을 근무하다가 대전 고향으로 가는 것은 수월하였다. 그러나 강원도를 벗어나는 것은 큰 행운이 뒤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학창시절에 강원도 여행을 해서 사전에 이토록 열악한 환경을 파악했더라면 고민하지 않고 서울로 직장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직장 내에서도 영서지역 사람들은 순박하고 텃세가 별로 없는데, 유달리 영동지역 사람들의 억센 텃세에 자주 충돌을 하게 되었다. 대전에서 함께 온 대학동문 선배 중에는 발령 첫날 사표를 내고 대전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또 다른 대학동문 선배는 잠시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미국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모 기업체에 입사를 하여 그룹 총수 오른팔로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다.
결국 주위 만류와 결단력 부족으로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강원도에 온 것을 매우 후회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태백선 열차와 제천에서 충북선 열차를 타고 대전에 오고가면서 바라보는 영월이 매우 좋아보였다. 몇년 후 영월 시골지역으로 이동한 후 가정을 갖게 되었고 아이들도 키우고 10년간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강원도 사람으로 변모하였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영월 이웃들과도 매우 친하게 지내었다.
영월 주민들은 매우 순박하고 정겨웠다. 후일 영월을 떠나서 원주로 오던 날 우리 아이들을 맡아서 돌봐주시던 아주머니는 헤어짐이 섭섭하여 길가에 주저앉아서 엉엉 목놓아 우셨다. 출발하던 차량을 세우고 아주머니를 달래야 했었다. 막내 녀석이 유치원에 적응을 못하고 병이 났을 때 그 아주머니를 긴급히 호출하였고 원주까지 오셔서 우리집 아파트에서 2주간 머물면서 막내 아이를 돌봐주시기도 하였다.
영월 읍내에서 살 때 미국 플로리다가 고향인 새파란 눈을 가진 원어민 영어선생님을 만나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는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였다. 그는 종종 우리집에 왔었고 나 또한 그의 집에 자주 가서 밤늦도록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나의 두꺼운 영작 연습노트 두 권을 교정해주기도 하였다. 그는 어린 우리 아이들을 매우 사랑해주었다. 지금도 그 당시 거실에서 매우 어린 우리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촬영했던 영상을 보면 즐거움이 되살아난다.
대전 고향을 떠나왔지만 완전히 떠나온 것은 아니었다. 어린시절부터 길러주신 조부모님을 뵈려고 세상을 뜨신 날까지 대중교통과 승용차를 이용하여 2주일 간격으로 대전 시골집을 왕래하였다. 집안의 온갖 대소사에 참석하기 위한 장거리 운전도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나중에는 처가를 강릉에 둔 처지로 오늘날 기준으로 고속도로라고 볼 수도 없는 편도 1차선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굽이굽이 고갯길을 수없이 넘어야 했으며 동서남북으로 장거리 운전을 해야만 했다.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경제력을 많이 투입한 셈이고 육체적 에너지를 너무나 소비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직장에서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직장의 지역적 위치는 더욱 더 중요한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취직 걱정을 안해도 됐기에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마음껏 젊은 시절을 호탕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다. 대학 산악회, 보컬 그룹, 여행, 운동 등 취미동아리에 가입하여 풍요롭고 활동성 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TIME 연구반 동아리에 가입하여 쓸데없이 영어공부와 번역연습에 몰두하였다. 취미동아리도 많았는데 굳이 공부의 연장선에 있는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그렇다고 꿈을 달성한 것도 없다. 고교시절부터 가고 싶었던 미국유학의 꿈도 허공에 날렸다. 2000년대 초반 대학원 학생 시절 석사과정 학생들의 과감한 미국유학 실행을 보면서 그들의 결단력과 실행성에 감탄하였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연히 영어통번역사가 되겠다고 쓸데없이 통번역대학원 입학 영어공부에 몰두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였으나 나중에는 주변인들의 충고에 따라 포기하였고 결과적으로 영어통번역사가 되지도 못하였다. 즉, 쓸데없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였다. 공부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젊은 시절 나에게 충고한다면, 목표를 세웠으면 앞뒤 가리지 말고 결단력 있게 추진하라고 권하고 싶다. 또한 취미생활과 두 가지 정도의 주특기를 개발하여 갈고 닦으라고 권하고 싶다. 주특기를 갈고 닦아서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택하였더라면 더욱더 보람된 인생살이를 해왔을 것이다.
실제로 젊은시절 그런 삶을 살아온 대학교 동창생이 있다. 대학생활 때 태백시가 고향인 동창생 한 명은 주전공과는 별개로 전자공학에 관심이 깊어 ‘월간전자’ 잡지를 정기구독하며 오로지 전자 공부에 몰두하였다. 대전 유성에 위치한 그의 자취방에 가보면 항상 고물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온갖 전자 관련 부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취방 마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마을의 고장난 온갖 전자제품들을 심지어 부품값도 받지 않고 도맡아서 무상으로 수리를 해주었다. 마을 식당의 고장난 냉장고도 완벽히 수리를 마쳤다. 노인댁의 고장난 TV, 라디오 정도는 간단히 힘들이지 않고 수리를 해내었다. 나 역시 그에게 상표명이 ‘마이마이’인 소형 카세트 수리를 의뢰하였는데 완전히 분해, 청소, 조립하여 완벽하게 수리를 마치고 성능을 더욱 좋게 변신시켰다. 그는 남에게 재능기부를 하면서 자신은 점점 완벽한 전자분야 전문가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은퇴 후 그런 단계를 실행하느라 고군분투 중이지만, 그런대로 의미 있는 활동인 것 같다. 젊은시절 고군분투했던 학문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달성한 상태였으니 머리에 쥐나도록 쥐어짜내는 일은 접어버렸다. 이제는 가벼운 노동력이 가미된 숙련된 기능적인 일들을 해보고 싶다. 숙련된 기능적인 일들을 통하여 나를 위한 일도 하면서 주변에 도움을 주는 일도 해보고자 한다.